직장인의 시 / by문현기
1. 타이레놀
타이레놀 씹다가
유행했던 광고 카피가 생각났다
당신이 머리 아픈 건
남보다 더 열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다
내가 머리 아픈 건
나보다 당신들이 더 열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집에를 또 못 간다
2. 스마트폰 출근길
上, 위로 올리며
오늘의 뉴스를 확인한다
下, 아래로 쓸어내리며
사람들의 일상을 더듬는다
左, 듣기 싫은 말들을
저 멀리 밀어내버리고
右, 사진첩을 넘기며
보고 싶은 사람 얼굴 두드려보고
3. 모기
물고 물리는 세상에
물려서 가려우면
그나마 다행이지
4. 파리
수습이 안 되는 세상에
빌어서 해결되면
그나마 다행이지
5. 죽자
모처럼 만난 친구들이 반갑다
회사 때문에, 자식 때문에
만나지 못해도 이제는 납득이 갈
수천 개의 사연을 뚫고
내일은 연휴에, 맥주잔은 꽉 찼는데
오래오래 살고 싶은 날에,
이구동성으로 오늘 죽자고 한다
이상한 놈들, 오래오래 살고 싶은 날마다
야, 오늘 죽자!
6. 또 시작
덜컹거리는 지하철
앞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남자
거대한 분화구가 번쩍이는 정수리를 지나,
인생의 현이 하나둘 튕겨나가는
뜯어진 실밥 삐져나온 네이비 정장 재킷
열에 아홉은 들고 다니는
같은 브랜드의 가방
한 손에 스마트폰 한 손엔 삶의 무게
어제와 내일을 꼭 빼닮은 오늘, 또 시작
6. 연휴
자비로운 부처님이 길일에 오셔서
삼 일을 쉬었다
일배, 하루를 쉬면서 업무를 잊었다
이배, 이틀을 쉬면서 거래처를 잊었다
삼배, 삼 일을 쉬면서 직급과 소속을 잊었다
불가의 가르침을 휴가 중에 깨우쳤다
7. 여행 가는 길
더 일찍 일어나고
덜 피곤한 신기한 새벽
아이스커피와 햄버거를 손에 들고,
가자 가자
맛집 핫플레이스 카페 추천
항공권 특가 제주 렌트 오션 리조트
이렇게 좋은데
우리는 왜 서로가 아닌 다른 이들과
평일의 대부분을 함께 하고 있을까
저만치서 울리고 있는 거래처 전화를,
언젠가 받기는 해야겠지?
8. 선생님
나이 지긋한 어른들에게는
모두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때가 있었다
先生 먼저 나온 사람
요즘에는 후생님들이 부럽다
우연히 서점에서 보게 된 시집 '직장인의 시' 직장인으로서 공감되는 내용이 참 많습니다. 시에서 표현했듯 선생님이라 불려도 요즘처럼 후생님들이 부러울 때가 있었을까 싶습니다.
길일에 오신 부처님 덕분에 누리는 연휴의 호사는 직장인들에게는 정말 꿀 같은 휴가기간이지요. 간혹 때를 잘 맞춰오신 예수님께도 두 손 모아 감사의 기도를 올리게 됩니다. 오래전엔 주 6일제 근무도 있었는데, 주 6일 근무의 기억은 잊고, 주 5일 근무가 버겁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야, 오늘 죽자! 묘하게 여운이 남는 문구입니다. 친구들과 한 번쯤은 외쳐보았을 야, 오늘 죽자! 오랫동안 모임을 갖지 못한 현실에서 참 그리워지는 외침입니다.
직장인들의 생각과 생활을 제대로 옮겨 표현한 시집의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미소 지으며 읽게 됩니다.
어제와 내일을 꼭 빼닮은 오늘의 시작에 몸과 머리가 묵직해도 직장인이라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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